이 책은 한나 아렌트의 정치행위(Action) 개념을 사회로부터 쫓겨난 사람들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연구서다. 아렌트의 저서를 한 권씩 다 읽기엔 부담스럽고, 대표작이라는 <악의 평범성>은 그다지 안 끌리던 차에 , ‘쫓겨난 자‘의 관점을 중심으로 아렌트의 다양한 사유들을 엮었다는 점이 마음에 들어 골랐다.

Hannah Arendt (1906.10.14~1975.12.4.)
: 독일 출신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작가, 정치이론가. 하노버의 세속적 유대인 가정에서 출생.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하이데거 밑에서 철학을 배웠고 그와 길고 산발적인 연애를 했다. 이후 하이데거나 나치에 적극 협력하는 모습에 환멸을 느끼고 하이델베르크로 이주했다. 1933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교수 자격 취득을 박탈당하고 파리로 피신했고, 1941년에는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1950년 귀화했다.
꼴랑 한 두 줄로 압축된 삶이지만 가슴이 갑갑해지기에 충분했다. 나는 매년 비자 갱신 만으로도 머리 쥐어뜯고 싶은데. 어쨌든 ’쫓겨난 자들‘의 관점에서 그의 사유를 정리하려는 시도는 백 번 타당한 일 같네요.
처음엔 경계하는 마음을 곁들여 책을 펼쳤는데, 읽으면서 ‘ 아 내말이!!!’ 를 몇 번이나 외쳤는지 모른다. 아렌트의 사유의 근간이 되는 ‘세계’에 대한 전제를 두루뭉술한 형태로나마 내 안에 이미 갖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모든 사유는 사후적aftermath이며, 경험이 그 사유의 근간이 된다는 것.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외양으로서의 세계이기에, 서로 같지 않고 같을 수도 없는 개인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본 것을 설명한 말들로만 구성된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타인과 함께 살 수 밖에 없고 정치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존재들인 것. 타인은 예측불가하고 통제할 수 없는 불안정함인 것. 동질화하려는 시도는 부질없고 위험하다는 것.
혼자 하던 생각들이 ‘불멸성immortality’, ‘탄생성natality’ 같은 멋진 단어를 입고, 논리를 갖추어 머릿속에 구축돼가는 듯한 기분이 좋았다. 물론 책의 내용은 가슴이 먹먹해지는 쪽에 가까웠지만🙃
저자가 서문에 밝혔듯 이 책은 연구서다. 무엇이 사람들을 사회에서 끝없이 쫓겨나게 하는지, 쫓겨난다는 건 어떤 의미인지, 정치적 경험이 일천한 사람들이 어떻게 정치적 언어를 구성하고 집단으로 행위 할 수 있으며, 그 상태가 유지되려면 어떤 것들이 필요한지, 상처가 고립이나 혐오로 이어지지 않고 저항과 연대로 이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저자는 이런 질문들에 아렌트의 사유를 가지고 답하고자 했고, 그의 사유 만으로 부족한 부분은 주디스 버틀러와 조르쥬 바타유의 사유를 끌어다 답하려고 시도한다.
쫓겨난다는 건 무엇인가? 사회에서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오랜 기간에 걸쳐 사회적 자원에 대한 접근을 차단당하는 것이다. 기존 세상에서 자신을 설명할 말을 찾는 것에 계속해서 실패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왜 자꾸 쫓겨나는 사람들이 생기는가? 편견에 의한 낙인 찍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낯선 이웃’에 대한 두려움 혹은 불편함을 간편하게 해소하려 들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개인으로 (who) 보지 않고 어떤 특성을 가진 유형(what)으로 보아야 ‘문제’로서 제거하기 수월해지니까.
이런 일들이 체제를 가리면서 일어나겠냐마는, 책을 읽으면서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감이 깊고 선명해졌다. 특히 자유와 권력이 공적인 것이라는 아렌트의 주장은 새롭고 흥미로웠는데, 내가 ‘자유란 개인적인 자유이고, 개인이 마땅히 추구해야 하는 것’으로 정해두고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탓이다.
자유 = 내적자유로 간주할 경우의 폐해를 아렌트는 지적한다. 자유를 개인 의지의 영역에 국한하면, 자유는 자기통제와 개인적 노력을 통해 얻어내고자 하는 힘, 즉 힘에의 의지 will-to-power 가 된다. 그런데 개인이 자기통제나 자기와의 싸움에서 실패하는 순간 그것은 무기력/억압에의 의지 will-to-oppression으로 곧장 전환된다. 개인의 책임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 기득권자들에게 서로 고립되어 무기력한 사람들만큼 다루기 쉬운 이들이 없으니, 이들이 사는 곳에서 배제와 추방은 쉽게 일어난다.”
아렌트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행위’할 수 있는 능력이 자유이고, 그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일종의 잠재력이 권력이라 설명한다. 이때, 행위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억압의 주체인 사회를 고발하며, 나아가 세상에 자신의 설 자리(새로운 삶의 형태)를 요구하는 정치적인 행동이다.
그렇다면 쫓겨난 사람들은 어떻게 함께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 어떻게 비존재애서 존재로 세상에 다시 모습을 얻을 수 있을까?
쫓겨난 것을 자각해야 할 것이고, 자각한 파리아(쫓겨난 자)는 기존 세상에서 비존재로 계속 살기를 택하거나, 자신을 쫓겨나게 한 바로 그 정체성을 숨기고 자기를 쫓아낸 사회에 동화되려는 노력을 개인적으로 전개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경우에도 자아는 분열될 것이며 (소멸-자살-할 우려도 크며) 기존의 차별 시스템을 돕는데 일조한다는 책임도 피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저항하기, 행위하기인데…
쫓겨난 자들은 이미 세상에 들리거나 보이지 않는 상태이고 남들과 함께 정치적으로 행위해 본 경험이 없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자신처럼 쫓겨난 사람들과 연대하여 함께 행위 하는 수 밖엔 없는데, 상처에 매몰되거나 쉬이 동질화 하려는 욕망에 휩싸이지 않고 이를 성공해내기란 무척 어렵다. 어찌어찌 성공한다 해도 이들의 행위가 기존 사회로부터 응답 받지 못할 경우, 쫓겨난 자들의 집단은 더욱 깊은 절망으로 고립될 수 있다 .
특히 이 부분:
차별과 배제에 저항하며 만들어진 장소에서도 차이에 따른 차별과 배제가 일어난다. 게다가 쫓겨난 자들의 상처는 곪기 쉬워서 안팎의 문제들을 감당해나가며 여러 사람과 관계를 맺고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중략…) 장소 안의 관계 단절이나 분열의 문제는 장소 자체를 해체시키는 심각한 결과를 낳는다.
나 이거 뭔지 알아 ….
알만한 사람끼리 급 나누고 싸우기. 급한 마음에 섣불리 동질화 하려들기. 상처 받았다는 이유로 남도 바닥으로 끌어내리려고 하기. 자기 상처에 매몰되어 주화입마에 빠지기. (상처받은 자로서의 정체성을 너무 소중히 여기기+ 상처 꾸미기에 집중하기 포함), 자기를 온전히 이해 못하는 사람이랑은 절대 함께 할 수 없다고 선 긋기 등등.
아 버튼 눌려.. 가만히 지켜보는 것도 속 터지고 맘 닳고 스트레스 받아 귀 막고 등 돌리기 되는데 이게 가능한가요?
ㅇㅇ가능.
저자는, 그리고 저자의 입을 빌린 수많은 연구자들은 가능하다고 말한다. 비록 그 확률에 대해서는 무한한 비가망성(기적이라는 뜻)이라는 아득한 표현을 쓰지만🙃, 역사적으로 저런 연대와 연결이 완전히 사라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증언한다.
신자유주의 체제 내에서도 생존 경쟁과 이해관계의 틀에서 벗어나 ‘마치 그것이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던 일인 것처럼’ 행위 하는 동시에 ‘마치 그것 이 이미 여기에 와 있는 것처럼’ 행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지옥의 한가운데서 지옥 속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려 하고, 지옥이 아닌 것을 구별해내어 지속시키고 그것에 공간을 부여하는” (칼비노,
2007: 207) 사건을 일으킨다.
목이 콱 매잖냐… 목격한 것에 대한 증언이라는 점에서, 때로는 보고서나 연구서가 소설보다 더 진한 자국을 맘에 남기기도 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 대목에 이르러, 나는 그동안 내가 각별히 좋아해온 이야기들이 이런 공동체에 대한 것, 혹은 “지옥에서 지옥이 아닌 것을 구별해내어 그것을 지속 시키고 그것에 공간을 부여하는” 사람들에 대한 것들이란 걸 깨달았다. 스어유, 센스에잇, 매트릭스, 안도르, Taali 기타등등.
그리고 야구🥹🤍
물론 야구선수나 야빠들이 ‘쫓겨난 사람들’은 아니지만… 기억의 조직체. 선수와 구단, 팬들에 이르기까지 동질하지 않은 구성원들이 각자 위치에서 자기 할 일을 하는 공동체의 매커니즘적인 측면 때문에 야구를 사랑하는 듯.
아렌트의 파리아 (쫓겨난 자) 개념이 유대인 홀로코스트에서 비롯된 것임을 떠올려보면, 나는 어떻게 해도 ‘쫓겨난 자’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를 이루는 정체성 중에도 보이거나 들리지 않는 것에 가까운 것이 있다. 고립감에 절망 했던 경험이 있고, 장기간 피할 수 없는 폭력에 노출된 경험도 있다. 또, 세상이 지금보다 덜 파편화된 시기에 청소년기와 이십대를 보내고, 사람을 많이 만나는 직업들을 거친 덕분에 나와는 전혀 다른 가치관과 능력을 가진 사람들과 부대끼고 싸우고, 웃고, 안되는 일을 되게 만들고 같이 기뻐한 경험도 있고.
책을 읽다 보니 이 모든 게 요즘은 얻기 힘든, 일종의 ‘자산’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을 하니까 웬지모르게 어깨가 묵직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뭣도 아니고, 누가 그러라고 멱살 잡은 것도 아닌데.. 왜 자꾸 점점 녹아 없어지는 빙하 위의 북극곰을 바라보는 기분이 들죠. 왜 가만히 있으면 안될 것 같은 기분이 들죠.
그래서 자꾸 생각해보게 되는 것 같다.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에 개의치 않고, 거기서는 뭐가 보이고 여기서는 뭐가 보이는지에 대해 어떻게 끝없이 대화를 이어갈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장소들이 사라지지 않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을지.. 그치만 그런 질문들에 대한 어느것 하나 명쾌하게 답할 수 없네요.
다만, 목이 터져라 소리치고 있는 사람들의 말을 좀 더 찾아 듣자고 다짐하게 됐다. 그리고 차이에서 비롯되는 불편함을 최대한 느끼고 있을 것. 건들거나 없애려 하지 말것.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우정의 정치적인 요소는 “친구에게 공통의 세계가 어떻게 나타나고 또 구체적인 모습으로 보여지는지를 그의 친구라면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 이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이를 염두에 두는 게 아니라 그렇게 나와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계를 보기 위해 끊임없이 ‘대화discourse’를 나눌 수 있는 관계를 염두에 둔 언설이다.(…) 우정의 본질은 말의 나눔에 있고, 말을 나눔으로써만 세계는 인간적이게 된다. 또한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말을 나누는 과정 속에서만 “우리는 인간이 되는 것을 배운다.” (127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