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만 찔끔찔끔 하나씩 내놓던 Wunderhorse가 드디어 2년만에 정규앨범 전곡을 공개했다.
선공개된 곡들도 괜찮긴 했지만 1집의 Atlantis나 Mantis처럼 듣자마자 마음이 잠자리 날개처럼 파르르 떨리는 곡은 없어서 아쉬웠었다. 그런데 어제 신보 정주행을 하다 드디어 만난거야.
나는 설거지 중이었다. 은근히 집중해서 앨범 정주행하기 좋은 시간: 설거지 타임. 첫 트랙부터 잘 들어나가다가 앨범 중반부에 갑자기 확 느려진 묵직한 비트에 흐느낌인지 울부짖음인지 분간 안되는 뭉개진 소리에 갑자기 엉엉 울고 싶어지는 거라.
앙.
Superman
나는 히어로물을 안 좋아한다. 특출난 한 사람, 또는 선택 받은 몇 명이 자력으로 역경을 딛고 세상을 구하는 이야기가 재수 없다. 대부분의 히어로물이 미국산이라는 것도 히어로물을 더 재수 없게 만든다. 그치만 영원히 하늘을 날 일 없는 사람이 하늘을 보면서 작게 토해내는 슈퍼맨… 이라는 단어는 사람 가슴을 너덜너덜하게 찢어.
슈퍼맨은 가사 전개와 곡 진행의 아다리가 기막히는 곡이다. ‘떠내려가는 기분이야. 이 사무실 밖으로, 천장을 뚫고, 빌딩들 위로..’ 현실에 발 못 붙이고 떠내려가며 뱉은 힘없는 읊조림은 상승하는 소리와 함께 자세를 고쳐 하늘로 날아오른다. 내 안에 있는 힘을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어.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내가 세상을 어떻게 구했는지.
난 구름 위에 있어. 비행기들을 지나고 있어. 주변은 온통 불이야. 최고 속도에 도달하는 중이지!
하지만 빌드업의 정점에서, 단말마 같은 슈퍼매—앤 을 끝으로 노래는 무겁게 바닥을 향해 고꾸라지는데..
설거지 중단 사유에 해당됩니다.
나는 이 곡이 아무도 ‘몰라주는’ 특별한 나와 그런 나의 외로움에 대한 노래라고 생각하고 싶진 않다. 그건 좀 멋도 없고 별로다. 그보다는 세상에 대충 낑겨 살기 위해 안으로 욱여 넣어야 했던, 모나고 날 것인 것들. 이제는 잘 길든 날카로움, 뻐기고 싶은 마음, 마구 지르고 싶은 흥분과 슬픔, 그리고 대부분 분노인 것들을 떠올리게 됐던 것 같다. 마음 밑바닥에 묶여 있지만 아주 죽지는 않았고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것들. 이것들이 해냈을 수도 있었을 일에 대한 위로, 혹은, 앞으로 꺼내 써야 할때가 오면 어디 있는지 잊지 말자는 다짐이라구 생각해.
오타쿠 특: 갑자기 벅차오름.
마음이 먹먹해지는 바람에 머그컵에 호지차를 한 잔 내려다가 베란다로 나갔다. 두껍게 구름낀 하늘 저 위로 솔개 한 마리가 날았다. 솔개는 독수리랑 다르게 여럿이 뭉쳐 다니고 사냥꾼이라기보단 청소부에 가깝다. 그래도 어때. I spread my arms, just like an eagle, a beautiful bird 라는 구절을 지날 즈음 진심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솔개면 어떻구 독수리면 어떤데. 진짜 아무 상관 없다. 잠깐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으면 괜찮습니다.

July
처음부터 끝까지 죽을 준비 완료를 부르짖는, 앨범에서 제일 파워풀한 트랙이다. (그리고 뮤비가 너무 귀엽고 좋음) 7월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여기서 한 발짝만 더 떼면 또 병원 행이야. 난 스프링처럼 뛰어. 짐승처럼 발길질 해. 죽을 준비 돼 있어. why the fuck should I keep up the appearances? 내가 왜 겉치레 해야 돼.
죽을준비완료라했다. 응죽으면그만이야~내내 분노하면서 마구 달려 놓고는, 결국 흥분 다 가라앉히고 튠 나간 기타소리 흐지부지 끌며 힘 빼버리는 마무리가 백미다.
끝까지 소리만 질렀으면 꼴 사납고 힘 빠졌을텐데. . 쿨다운을 싹 해준 덕분에 시원한 카타르시스 한 사바리 완성이다. 기타소리 늘어질 때 심호흡도 하게된다. 아 ~ 내가 죽을 준비 됐다 했지 언제 죽고 싶다고 했어. 죽을 준비 된 사람이 말하는 죽음은 목적지도 패배도 아니니까.
시원하게 갈! 하고 난 다음 트랙은 사랑노랜데,
Cathedral
이 곡을 처음 들은 뒤의 감상: ‘간지X돼..’ 상스럽지만 달리 표현할 말을 찾기 어렵다.
바다에 난파선이 있고, 나무엔 만개한 꽃이 있고, 내게도 작은 부분이 있어. 그게 너야. // 불길에 휩싸인 말들이 있어. 말들이 내 혈관을 따라 달려. 고통 속에 아름다움이 있어.
나는 스스로 사라질거야. 다른 것이 될 거야. 추접함을 다 삼킬 거야. 네가 그러길 바란다면. // 성당이 불타고 있어. 성당이 불타고 있어. 내가 거기 불 질렀어. 너만을 위해.
Love, 뭘 하려는 거야? Love, 난 오랫동안 기다리고 또 기다려왔어 딱 너를.
한글로 옮겨 놓으니까 진짜 맛이 안사네 .. 어쨌든 나는 왜 이렇게 케이팝 남돌이 부를법한 광기의 사랑 노래가 좋을까. (엔시티의 Favorite, Exo의 Forever 좋아합니다.) 눈에 뵈는 것 없는 사랑, 나도 너도 다 태워버리는 사랑, 분노를 닮은 사랑. 매번 그런 사랑을 한 것도 아니고 그런 사랑만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지만 이런 노래들을 자꾸 듣게 됩니다. 사랑하게 됩니다.
구구절절 없이 성당, 난파선, 만개한 꽃, 말, 불길 이런 오타쿠가 반응할 단어들을 잘 조합해서 그런지(grunge)한 소리들 위에 활활 불태워버리는 노래를 좋아하지 않을 방법: 없음.

침대에 엎어져 세탁을 여러 번 해서 야들야들 부드러워진 홑이불에 얼굴을 묻고 이 노래를 여러 번 들었다.
인생에서 감정이 폭발하고 질질 넘쳐 흐르는 대로 내버려 둬도 되는 때는 거의 없다. 심지어 누구를 좋아할 때조차도.. 사람은 아마 ‘말’을 배우기 시작할때 부터 그러면 안된다는 것도 같이 배우기 시작하는 거 같다. 그러니까 얼마나 운이 좋아.
홑이불에 코를 박고 달큰한 냄새를 맡으면서 나는 운 좋게 가질 수 있었던 장면들을 떠올렸다. 화산처럼 폭발하고 거침없이 욕망하고 요구하고 행동하고 눈을 들여다보고 그 눈에서 똑같은 불길을 읽고 겁도 읽고 비난도 듣고 응응 더 해봐 받아치고 꽉 끌어안으려다가 잠깐 끌어안았다가 아파서 떨어졌던 시간들을 길어다가 노래에 쫄쫄 부으면서 맛있게 들었다. 납작 엎어진 몸이 어디에 깔리기라도 한 것처럼 욱신거리고 저릿저릿하니 진짜 좋았다 . 음악이라는 거 진짜 좋구나.
이렇게 Wunderhorse 정규 2집 감상 끝. 이 외에도 Arizona, Rain, 그리고 Silver가 좋았다. 항상 거를 곡 없이 트랙순서까지 알찬 앨범 들고 나오는 운더홀스가 참 좋다.. 근데 왜 나만 아는 것 같지.🤓 내가 학생이면 커버하고 싶어서 악기 배우기 시작함. 밴드부가없으면 밴드부 만듦. 밴드부라면 축제 때 커버무대 운더홀스 곡으로 함. 너무 좋아서 같이 듣고 싶은 밴드 1위이니까 많은 관심 부탁 드립니다.
어쨌든 꼴랑 노래 몇 곡에 설거지를 하다 말고 차를 우려 베란다로 나가고, 하늘을 보고, 침대에 엎어져 가만히 있다가 일기를 몇 페이지 씩이나 쓰고 오바 쌈바하며 시간을 막 썼다. 음악은 참 멋져. 그리고 막 쓸 시간이 있는 생활은 참 행복하다. (2024.8.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