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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영화: <Laapata Ladies>, Kiran Rao

한국이랑 많은 부분이 다른 나라다 보니, 이따금씩 무슨 내용일지 가늠이 안되는 시놉을 만나곤한다. ‘인도의 한 시골 마을. 갓 결혼한 두 커플의 신부가 뒤바뀌는 일이 발생한다. 새 신부들은 무사히 남편을 찾아갈 수 있을까?’ 라는 말에 호기심이 동해 재생 ▶️

영화는 아직 핸드폰이 드물던 2000년대 초 인도의 시골을 배경으로 한다. 집안 어른들이 정해준 상대긴 하지만 서로를 깊이 좋아하게 된 디팍Deepak과 풀Phool. 둘은 관습대로 신부인 풀의 집에서 결혼식을 마치고 디팍의 집으로 가기 위한 길을 떠난다. 기차역까지 가는데만도 산 넘고 강 건너 버스까지 타야 할 만큼 먼 길이다.

둘이 있을 때만 벗을 수 있는 베일

디팍은 혹여 경찰이 삥 뜯어갈 수 있으니, 몸에 두른 패물을 빼 자기 가방에 넣어두라고 풀에게 말한다. 무탈히 기차역에 도착하는데, 열차에 오르고 보니 같은 칸에 갓 결혼한 커플이 무려 세 쌍이라~ 때마침 길일이라 디팍과 풀 외에도 결혼한 커플들이 많았던 것이다.

지정석 없이 되는 대로 낑겨 앉게 되어있는 좌석은, 이미 두 쌍의 신랑 신부와 그 가족들로 빼곡하다. 디팍은 좁은 자리에 일단 제 아내를 앉히고 화장실에 다녀오겠다 말하는데, 그 사이 중대한 사건이 발생한다…… 좌석 코너 자리가 비게 된 것이다.

코너 빈자리 못 참는 건 만국 공통이라 ㅋ 편한 자리 사수를 위해 채우고 땡기고, 채우고 땡기는 돌려돌려 야바위 판. 그러나 세 명의 신부 모두 똑같이 생긴 빨간 베일과 드레스 차림인 까닭에, 화장실에서 돌아온 디팍은 신부들의 자리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른채 빈 자리에 몸을 구겨 앉게 된다.

저 아저씨는 다른집 신랑임

해는 지고 밤은 깊어가고 , 달리는 열차 안에서 고된 하루를 보낸 세 쌍의 신랑 신부 및 가족들은 모두 불편한 자세로 곯아 떨어지는데-

한밤 중, 갑자기 잠이 깬 디팍은 바깥에 보이는 익숙한 역 이름에 화들짝 놀라 일어난다. 얼른 가방부터 챙기고 옆에서 곤히 자던 신부의 손을 낚아채고는 열차에서 내린다. 자다말고 다짜고짜 이끌려 내리게 된 신부는 어리둥절해 하다가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닫지만 잠깐의 고민끝에 뭔갈 결심한 듯 어딘지도 모를 곳을 향해 남의 남편을 따라나서는데 –

새 신부가 베일을 벗는 순간 온 동네가 뒤집어진다. 너는 누구니..? 경악은 금세 젊은 남녀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진다. 어떻게 자기 신부를 못알아보고 외간 여자를 데려오냐는 질책에 아무 말도 못하고 머리만 쥐어 뜯는 디팍과 달리, 뒤바뀐 신부는 태연자약이다. 저는 자고 있었는데 님 아들이 냅다 저 끌고 내린 거거든요. 그리고 같은 칸에 결혼한 커플이 세 쌍이나 있고 한밤중인데 어떻게 알아봐요. 신부라고 밖에선 두꺼운 베일도 못 벗고 얌전히 땅만 보고 걸어야 되는데.

반박 불가.

할 말 없는 어른들은 이제 걱정을 늘어놓는다. 정숙한 신부는 다른 사람에게 절대로 자기 남편 이름을 말하지 않는 법인데, 이제 무슨 수로 이 여자 남편 이름을 알아내서 찾아준담. 우리 며느리는 또 어디서 어떻게 찾아온담. 사돈 댁에는 뭐라고 말한담. 바뀐 신부는 또 한 번 입을 연다. 제 이름은 푸쉬파, 남편 이름 판카지, 탑승한 곳 ㅇㅇ역, 내렸어야 할 곳은 몰라요.

남편 이름 시원하게 부는 발랑 까진 남의 집 며느리에 일동 기절.

멋진 푸쉬파 🤍

아무리 옛날 인도 시골을 배경으로 한다지만 아내는 남편 이름을 함부로 말해선 안된다는 룰(?) 같은 건 상상도 못했던 나도 경악😨 그래도 이 쪽은 정숙같은 거 걷어 찬 신부 덕에 상황이 해결될 기미라도 보이지.

한참을 자다 기차가 멈추는 것을 느끼고 깬 풀은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주변에 디팍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사색이 되어 정차한 역에서 일단 내리는데, 그때부터 영화는 오싹한 스릴러물이 된다. 도움을 청하자니 깡패이고, 역사 밖으로 나가자니 한 무리의 릭샤꾼들이 다가오고, 릭샤꾼들을 피해 뒷걸음질 쳤더니 멀찍이서 지켜보던 노숙인이 히죽히죽 웃으며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가진 거라고는 입고 있는 빨간 웨딩드레스와 몸뚱이 뿐. 갈아입을 옷도, 돈으로 바꿀만한 것도, 연락 수단도, 어느 역에서 내렸어야 하는지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맞닥뜨리게 된 미성년자..

풀은 날 밝기를 기다려 역무원에게 부탁해 경찰서에 간다. 정숙한 아내가 되도록 교육 받은 여자답게 남편의 이름을 말하는 대신 손바닥 헤나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디팍의 이름을 경찰에게 보여주고, 자기 고향 이름도 말한다. “그리고 남편네 마을은 무슨 꽃 이름이었는데 무슨 꽃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아요. ” 그 말을 들은 경찰은 맥빠진 얼굴을 한다. 같은 이름인 동네가 인도에 수 백 수 천 갠데요. 어느 지방인지도 몰라, 자기가 어디서 기차를 탔는지도 몰라, 어디서 내렸어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찾냐고. 절망한 풀은 엉엉 운다. 엄마로부터 모든 것을 잘 배웠다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길 잃었을 때 혼자 집 찾아갈 줄도 모르는 처지가 얼마나 어이 없어.

다행히도, 무서운 줄만 알았던 노숙인 일동이 힘써준 덕에 플랫폼에서 분식집을 하는 만주 Manju 아주머니에게 신세를 지게 된다. 언제든 디팍이 자길 찾아낼 수 있게 늘 빨간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남편 마을 이름을 떠올리기 위해 매일 온갖 꽃 이름을 하나씩 헤아리면서, 기약없는 분식집 보조 생활 스타트 ••🫠

무서운 만주 아주머니.


여자에겐 남자가 아니라 경제권과 자립이 필요하다는 만주 아주머니 눈엔, 까맣게 젊은데도 남편 바라기인 풀이 너무 답답하다.

이후 이야기는 스릴러, 추리물, 르포, 코미디, 적당한 로맨스를 절묘하게 넘나들며 굴러간다. 탁월한 균형감각과 시종일관 흐르는 위트, 다음 장면이 궁금해지는 이야기 솜씨에 무릎을 치게되는데, 사실 이야기의 알맹이는 더없이 뾰족하다.

누가 이 여자들을 이렇게 만들었나?

왜 길을 잃었을 때 스스로 집 찾아갈 줄도 모르게 만들었나?

일견 코믹해보이고, 금방 해결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해프닝은 여자들이 혼자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사회 탓에 자꾸 꼬이고 꼬인다. 그렇지만 또 어떻게든 자기 삶을 살고자 안간힘을 쓰는 여자들의 연대 덕분에 거짓말처럼 해결이 됨.

이야기의 끝에서 팝콘처럼 터져나오는 마음들이 너무 벅차서 막판에는 진짜 흐앙 소리나게 울었음을 고백합니다.

내 이름은 꽃

이 영화에서 꼭 언급하고 싶은 것은 이름에 대한 것이다. 풀 Phool과 푸쉬파 Pushpa 는 모두 ‘꽃’ 을 뜻한다. 영화 배경을 고려하면 꽃님이랑 꽃분이 쯤 되려나. 어쨌든 이야기 초반, 이 이름들은 두 주인공을 아름답지만 무력한 존재로 느끼게 한다. 하지만 이야기가 흐르면서 이름에 점점 힘이 생기다가, 후반부에 다다르면 이 꽃들이 사실 화병에 하나씩 꽂힌 예쁜 꽃이 아니라, 한꺼번에 꽃망울을 터뜨려 다음 계절을 불러오는 꽃무더기 였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꽃무더기가 주는 벅찬 에너지에 울게 됩니다.

승리를 품은 꽃

푸쉬파의 왼쪽 손목 안쪽엔 자야 Jaya 라고 새긴 타투가 있다. 승리라는 뜻으로 어렸을 적 할머니가 불러주던 이름을 새긴 것이다. 상당 액수의 예물을 착용한 채 사라진 자신을 찾아내려는 일당이 제 손목의 타투를 단서 삼고 있다는 걸 알게 된 푸쉬파는 타투 글자를 변형해 위기를 벗어난다. 하지만 누군가 “자야” 하고 부르는 소리에 무심코 뒤를 보았다 정체를 들키고 마는데.. 그 장면을 지날 때는 힘이 쏙 빠졌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니까 너무 멋진 장면으로 남은 거 있지.

누구에게나 내 이름을 꽃이라 소개했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진짜 이름은 승리. 그치만 승리는 숨겨지지 않는 거야❕

빛을 바라보는 꽃

디팍이 자기를 찾아낼 때까지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분식집 보조 생활을 이어가던 풀은, 매일 자기가 가야하는 곳인 디팍의 마을 이름을 기억해기위한 스무고개를 한다. Parijat, Nalini, Mogra – 동료가 온갖 향기롭고 예쁜 꽃들의 이름을 대어도 매번 고개를 젓는데, 사실 풀Phool이 꽃을, 디팍Deepak이 빛을 뜻하는 걸 떠올리면 이거 답정너 문제거든요.🌻

어쨌든 기차역에서 생활하는 동안 풀의 마음에 생긴 변화와 둘이 재회하는 과정을 떠올려보면 이 마을 이름이 너무나 소박하고 벅차고 기분 좋게 다가와🥹

따로 또 같이

이 영화에서 또 좋았던 것은,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그걸 개선하기 위한 하나의 방향만 제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돈 버는 일의 중요함과 즐거움을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남편과 함께할 때 가장 행복한 풀, 가부장제라면 학을 떼면서도 풀이 남편과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만주 아주머니. 계속되는 시련과 심지어 그 와중에 싹튼 로맨스에도 눈 하나 꿈쩍 않고 꿈을 향해 직진하는 푸쉬파. 그리고 또 많은 여자들..

각자 살아온 삶의 모습과 삶의 우선순위가 다르기에 서로 오해하고 마찰을 빚을 수도 있지만, 각자 위치에서 가장 자기다운 삶을 좇으면서 가능한만큼 공감하고 화해하고 마음 덧대다보면 세상은 분명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이야기에 어떻게 가슴 떨리지 않을 수 있겠어.

인도의 여성 인권에 대해서는 누구나 거리낌 없이 ‘최악’ 이라고 단정 짓는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분명 그렇다. 하지만 가부장제에 저항한답시고 하나의 단일한 방법만을 제시하고 거기 동참할 자격마저 제한하는 것에도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한국 내 움직임을 떠올려보면, 이런 영화들이 만들어지고 또 널리 사랑 받고 있는 것 역시 인도의 현실이라고 말하고 싶다. (라파타 레이디스는 9월 둘째 주 기준, 역대 인도 넷플릭스 인기 영화 7위에 랭크해 있다. )

2024.3/키란 라오 Kiran Rao

제작: 아미르 칸 Aamir Khan, Jyoti Deshpande

출연: Nitanshi Goel(Phool), Pratibha Ranta(Jaya), Sparsh Shrivastava(Deepak), Chhaya Kadam, Ravi Kish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