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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전,란> (2024)

박찬욱 감독이 박정민을 주연급으로 해 각본과 제작을 맡은 영화가 나온대. 게다가 강동원이 몸종이고 박정민이 도련님이래! 이 소식을 전했을 때 Y가 고개를 갸우뚱 하며 그랬었다. ‘그 양반 각본은 더럽게 못 쓰던데…’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예고편을 보고 내가 기대한 것: 자격지심을 감춘 양반(박정민)과 혁명의 불꽃을 품은 몸종(강동원)이 보여주는 <왕의 남자>.

실제로 내가 얻은 것: 맛없는 잡탕밥.

많은 리뷰가 주장하듯 <전,란>이 정말 계급을 중심에 두고 다양한 사람들의 삶과 입장을 엮어내는 데 성공한 (CJ 감성) 영화였다면 “종과는 친구가 될 수 없소..?” , “주인 무는 개는 죽일 수 밖에.” 같은 피가 식는 대사도 받아들였을 것 같다. 그런 영화들은 또 그런 영화들만의 맛이 있으니까. 하지만 <전,란>은 그런 이야기가 되길 택하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종려-천영-겐신 삼각관계를 찍고 싶었던 거예요 아니면 혁명극을 찍고 싶었던 거예요? 계급 얘기하랴, 삼각 관계 엮으랴, 유머도 끼얹어야지 풍자도 해야되지. 맞다, 강동원 영상 화보도 넣어야 되고(사실 그게 제일 중요하고), 경복궁 불 쇼도 넣자. 레미제라블도 좀 섞고.

남자 셋의 삼각관계로 소비 당하는 게 너무 무서웠던 나머지 이것저것 과하게 섞다 이렇게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 근데 귀신 같이 맛있는 부분만 집어먹고 있는 (후죠)팬들 덕분에 이 지루한 영화가 조금이라도 재미있어진 것 같애.

사실 박찬욱이 각본을 쓰는 영화에 강동원이 몸종으로 나온다고 했을 때 내가 바라지 않아도 촉촉한 눈으로 ‘도련님..’ 하는 강동원이 나올 줄 알았는데. 종놈이 아닌데 종놈으로 만든 세상에 분노하는, 그 ‘정당한’ 억울함과 오만함을 끝까지 지켜내는, 잘생기고 잘난 남자의 외길을 그려낸 게 너무 웃겼다. 자캐놀이그만

어쨌든 이 세 남자들은 사랑을 한 게 맞아요. 그 중에서도 순애를 한 건 종려였는데, 박정민 배우가 그걸 캐치한 것도 웃겼다.

박정민은 두 인물의 관계성을 쌓아가는 과정에 대해 “과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주면 안 될 것 같았다”라고 설명했다.” (중략) 처음에 천영이가 잡혀 왔을 때 종려가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하는데 우정을 넘어선 어떤 것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과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주면 안 되겠다 싶어서 그런 부분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어요.”

마지막에 미안하다는 대사를 하는데 그건 대본에 없었어요. 천영의 얼굴을 보면서 갑자기 미안해져서 한 건데 김상만 감독님, 박찬욱 감독님 두분 다 좋다고 하셔서 그렇게 나온 장면입니다. 

(씨네플레이 인터뷰 (24.10.14) https://blog.naver.com/cine_play/223621376860)

과연 격정 멜로인 <파수꾼> 이랑 <들개> 를 찍은 배우 답다.

종려가 천영에게 첫 눈에 반했음은 자명하다. 대를 이어온 성공한 ‘무인 집안의 장손’, 어려서부터 무인이 되도록 ‘강요받고 통제 받는 삶’ : 삐빅, 중산층 퀴어 탄생 정석 루트. 소질도 없고 관심도 없는 일을 억지로 하며 살아가던 어느 날 혜성처럼 등장한 연상에게 반함 : 삐빅, 클리셰.

종려의 감정이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공감이고 호의라는 건 말이 안된다. 매 맞는 소년은 늘 있었고 거품 물고 쓰러지고 죽어나간 애들이 여럿인데, 자기 대신 남이 맞는 게 싫단 생각을 하게 된 건 천영이가 처음이니까. 심지어 취향도 뚜렷함: 종으로 들어왔으면서 오히려 ‘이도 다 안 난 게’ 하면서 제 얼굴 콱 쥐어 잡는 형아.

그리고 이름을 지어준 것… 원래 좋아하는 것에 가장 먼저 주고 싶은 것이 이름이잖어. 심지어 그 이름 뜻이 ‘따를 천에 그림자 영’. 이름을 준 순간에 이미 영원히 내 곁에 있어 달란 고백을 한 것이나 다름없는데 뼈테로남인 천영은 고백에 발끈한다. 내가 왜 널 따라다니냐. 천영은 이름 뜻에는 동의 않으면서도, 자신의 ‘진실(자신이 천민 계급이 아니라는)’을 믿어준 최초이자 유일한 사람이 건넨 이름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자기가 종놈이 아니라는 증거물이니깐. : 천영의 죄악 1.

그리고 매일 밤 칼 싸움(..)에서 종려를 제압하면서 ‘네 칼에는 분노가 없다’ 같은 말을 태평하게 지껄인다.: 천영의 죄악 2.

내 마음을 몰라줘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 vS 억울함을 풀고 인정 받고 싶은 마음. ‘내가 아직 네 동무냐?’ 라는 말에 대한 둘의 입장 차이를 중심으로 불필요한 것들은 다 쳐내고 긴장감 있게 전개했다면 더 깔끔한 영화가 됐을 듯.

겐신과 천영의 관계도 아쉬웠다. 이 둘은 일단 얼굴 합이 괜찮은데 (박정민 귀 막어) 닮아있다. 오만하고, 오만함에 대한 자신만의 명분을 가진 것. 전란을 기회 삼아 신분 상승을 몸빵으로 쟁취하려는 욕망과 목적 달성을 위해 잔인한 짓도 서슴지 않을 수 있는 싸가지도. 사실 이 둘이야말로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필요한 걸 주고 받을 수 있는 사이인데, 그걸 고작 몇 번의 액션씬으로 대충 보여주고 넘어간 게 너무 아쉬웠음.. 정성일 배우에게도 기회를 줘 보지.. (사실 제가 보고 싶었어요.)

영화적으로는 계륵 같은 부분들을 김신록 전진규 두 배우가 뛰어난 연기로 메꿔 주었고, 정성일 씨 핏 되는 옛날 군복도 좀 좋았구. 사랑의 고통을 차가운 분노로 표현한 박정민도 나쁘지 않았고. 이렇게 써놓고 나니 제법 재미있게 본 것 같은데 ㅋㅋ 그렇지만 괜찮음 보다는 아쉬움과 갑갑함이 훨씬 많이 남는 영화였어서요… 2.7 /5 드립니다. (2024.10)

2h 6m/ 2024/ 액션,전쟁/ 감독: 김상만 각본: 박찬욱

출연: 강동원, 박정민, 차승원, 정성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