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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머리

좀처럼 그릇을 깨지 않는데 정말 아끼던 유리그릇, 개완, 컵, 접시까지 기물을 3주 동안 네 개나 깨먹었다. 열쇠를 집 안에 넣고 잠가 잠금장치를 부수고 새로 단 지 열 달도 안되어 Y가 나랑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새 잠금장치와 열쇠가 생겼다. 일년 내내 의류에 십 원 한 푼 안쓰다 옷과 신발도 마구 사제꼈다. 크리스마스 기분 낸다고 홈패브릭과 빨간 테가 둘러진 접시들도 샀다. 그나마 몇 년 동안 사야지, 마음 먹던 아이템들을 할인가에 사서 다행이디..

요는 내가 좀 이상했다는 것이다. 곰곰 생각해보니 아끼던 컵들을 연달아 깨고, 새 열쇠가 생기고, 새 가구나 옷을 막 늘리는 시기가 약 5년 주기로 반복됐더라. 나는 운이 바뀌는 시기인 것 같다고 결론 지었다.

공교롭게도 사주에서 말하는 10년짜리 대운의 딱 절반을 지나는 중이다. 지난 5년 동안 내게 일어난 비가역적인 변화:

일단 새 친구들을 만났것. 다이빙을 하게 된 것, 러너가 된 것, 타투와 피어싱, 개완을 쓰기 된 것, 특히 우롱차를 사랑하게 된 것, 술 끊은(?) 것. 월급쟁이 생활을 그만 둔 것. 폰에 짤을 저장하고 파일도 바탕화면에 대충 던져두기도 하고, 뭐든 계획대로 안 돼도 머리 벅벅 긁게 된 것. 타로카드 컬렉터가 된 것(현재 삼십 개 쯤 모음ㅋ) 학위가 하나 더 생긴 것, 유투브에 친구들과의 영상을 모으게 된 것, 챗지피띠니의 침범. 그리고

흰 머리 …

십 대 때부터 늘 같은 자리에 나던 새치가 세 가닥 있었는데. 작년 초인가 거울을 보다 문득 정수리 앞에 흰 머리가 여기저기 난 걸 발견했다. 다급히 머리를 헤집어가며 다섯, 여섯 , 그래 여섯 개가 넘어가는 순간 기절할 것 같았다. 21년 즈음인가 눈 아래 지방층이 미세하게 꺼진 걸 느꼈을때보다 충격이었다. 동생에게 하소연 했는데 반응은 싸늘했다. ‘언니. 나는 이십대 중반부터 새치가 감당이 안돼서 주기적으로 염색하고 있는데.”

몰 랐 어 ..

나는 아빠를 닮고 동생은 엄마를 닮아서 그런가보다. 나는 동생이 몰랐던 내 이야기들을 나눠 주었다. 동생도 몰 랐어 .. 라고 했다. 몰랐어…. 라는 말은 오이 냄새같은 기분이 든다. 시원하면서도 이상하고. 묘하게 계속 맡고 싶어.

누구와든 조금 더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고, 나는 이제 전화통화에 거리낌도 없어졌는데 (이것도 늙어서인가.) 할 말은 줄어드는 것 같다. 사실 할말 자체가 사라진 건 아니지만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 확실히 나은 것 같다. 2년 전까지만 해도 다들 왜 자기 기분 관리를 못 하냐고 성냈었는데, 이제는 그런 말조차 유연석 행위라는 걸 받아들이게 됐다. 사는 게 어려운거야.. 제정신을 유지하려면 어떤 상황이건 가진 것들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 사실을 절대 입 밖에 내선 안됨. 그래서 요즘은 갈 곳 잃은 감사들을 일기에 털어놓기도 한다. 차의 맛 달렸을 때의 기분, 노을, 웃긴 농담 ,같은 것.

하지만 감사도 시간에 쫓기는 초조함을 지울 순 없다. 감사할 줄 알게 됐다고 해서 불평 빡침 스트레스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흰 머리가 여덟 가닥이나 낫고 건강검진 결과에 이상 수치가 떴기 때문이다. .. 경력직 환자인 엄마는 관리만 잘 하면 육십까진 인생 사는 데 큰 문제 없을거라 해줬지만 저는 이십보다 오십 살이 더 가까운 지점에 서 있다는 걸 받아들이기 힘이 듭니다.

진짜 힘듭니다.

그래도 살아야겟지.

어제는 연말 여행 숙소를 예약했다. 뭐든 할 수 있을 때 해야돼. 그러려면 부지런 해야해. 여행지는 이번 여행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이 좋았다고 알려준 섬인데, 삶은 바다 여행과, 바다 여행사이의 일상, 그리고 우연으로 이루어져있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괜찮아져. 노력도 주사위 던지기 같은 거라 생각하면 어깨에 들었던 긴장이 풀려. 6만큼의 노력이 가능할 수도 1만 가능할 수도.

해가 점점 길어지는 중이다. 망고가 나오기 시작했고, 야구 시즌도 다가온다. 지난 주엔 우연히 좋은 노래를 만나 며칠째 돌려듣고 있다. 흰 머리를 어떡하면 좋을지는 이십 가닥 넘어가서 다시 생각해보자.